'내가 특별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깨달음

Posted by hi G on 2012. 7. 14. 01:48
고대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저승은, 활활 타오르는 불에 타며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벌을 받는 그런 기독교적 개념의 지옥과는 무척이나 달랐다. 신들 앞에서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시지포스는 산꼭대기로 큰 돌을 굴려올리는 벌을 받았다. 그 돌은 산꼭대기에 오르자마자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고, 시지포스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를 영원토록 반복하는 것이 그의 형벌이었다.  

그리스인들이 상상했던 지옥은 ‘고통’보다는 ‘무의미함’이었다. 의미없는 행위의 끝없는 반복, 그 강박적 행위야말로 곧 죽음, 형벌, 즉 지옥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수천년 전 이미 ennui라는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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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이런 두려움을 갖고 산다. ‘결국 남들이 다 원하는 걸 갖기 위해, 평범해지기 위해 이 고생을 하는걸까... 다시는 예전처럼 alive해질 수 있을까.’ 이런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고자 하지만 끝내 소진되고 마는 어느 젊은 부부의 비극을 다룬 영화, <Revolutionary Road>를 보았다. 영화평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주제를 탐구하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어서 보기로 결심했다.  





처음 보는 남녀의 끌림, 반짝이는 어느 먼 이국의 도시, 배우가 되겠다는 꿈, 그리고 젊음... 이런것들은 우리의 삶에 무언가 ‘특별함’을 약속한다. 젊고 아름답고 지적인 프랭크와 에이프릴 윌러 부부 또한 서로의 ‘특별함’에 반해서 결혼에 이른다. 그리고 한적한 교외suburb로 이사해 가정을 꾸린다. 이건 아주 잠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한 일시적 방편일 뿐이라고 굳게 믿으며.  

그러나 프랭크의 사무직도, 에이프릴이 일상을 보내는 평화로운 교외의 집도, 하루하루 그들에게 지루함을 더해갈 뿐이었다. 일상의 무의미함에 몸부림을 치던 에이프릴은 남편에게 교외에서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 파리로 이사가자고 제안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직업에 전혀 만족을 느끼지 못하던 프랭크도 순간의 충동에 휩싸여 동의한다.

파리로 이민갈 준비를 하는 사이 주변 사람들은 모두 비현실적이라며 팔짱끼고 지켜보지만,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파리행 티켓과 비자 수속을 시작하며 가슴이 부풀고, 또 서로에 대한 사랑과 열정 또한 불타오른다.

하지만 영화 시작 전부터 영화가 비극이라는 사실을 알았던 나는, 일시적으로 다시 행복하고 삶의 열정을 되찾은 이 부부의 모습이 몹시 가슴아팠다. 파리행이 좌절되며 윌러 부부, 특히 에이프릴의 삶은 급격히 파국으로 치닫는다.


I just wanted us to live again. For years I thought we've shared this secret that we would be wonderful in the world. I don't know exactly how, but just the possibility kept me hoping. How pathetic is that? So stupid. To put all your hopes in a promise that was never made... [Frank] is right; we were never special or destined for anything at all.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특별하다’는 생각(착각?)은, 아이비리그 교육의 부작용인걸까, 20대의 저주인걸까. 단순히 교만했던걸까. ‘내가 특별하지 않다’고 깨닫는 것은 피해갈 수 없는 성장의 과정인걸까. 그리고 나의 '평범함'을 자각하는 그 순간 밀려오는 두려움은, 부끄러워야 마땅한 감정인걸까.

편안함과 지루함 대신, 고통이 따른다 하더라도 발전 가능성이 있는 예측불가능한 삶을 택하는 건, 단순히 배불러터진 제1세계 사람들의 무모한 자학행위인걸까. 그러다가 내가 택한 그 길에서 고통의 순간에 놓이게 되면, 그제서야 지루했던 그 나날들이 행복했던 거라고, 뒤늦게 후회하게 되는걸까.

영화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모두 부부싸움의 대화 내용으로만 전달한 것 같아 부담스러웠던 점이 아쉽다. 소리지르고 깨부수는 장면을 줄이고, 오히려 영화 초기에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밀려나오는 회색 정장에 중절모를 쓴 수많은 회사원 속에 묻혀있는 프랭크의 모습처럼, 조금더 subtle한 방식으로 무의미함, 평범함, 지루함, 일상 속의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전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한다. 

처절하게 시니컬한 메시지. 이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이 영화가, 오히려 묘한 안도감을 준다. 행복한 것만이 꼭 정상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현재 삶에 만족을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그게 나만 그런건 아닌걸 확인시켜 주는 것 같아서. 누구나 행복해보이고 잘나가는 모습만 부풀리는 페이스북의 가식을 견디다 못해 deactivate한 것과 같은 맥락이랄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