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n B"

Posted by hi G on 2012. 4. 10. 14:56

드디어 한국에서도 피임약 논쟁이 일고 있다. 현재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구매할 수 있는 응급피임약emergency contraception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해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며 찬반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나는 조심스럽게 찬성표를 던지고 싶다. '열렬히 찬성'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많은 청소년들이 적절한 성교육을 받지 못하는 한국에서 응급피임약이 오용될 소지가 있다는 말은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오용'은, 다른 더 효율적이고 안전한 피임법을 잘 모르고 응급피임약에 의존하는 경우이다. 

하지만 응급피임약의 부작용에 대한 언론의 관점은 상당히 왜곡되었다는 느낌이다. 어제 채널을 돌리다 'mbc 시시각각'이라는 코너에서 응급피임약에 대해 다루는 것을 봤는데, 응급피임약 복용 후 복통, 출혈, 메스꺼움 등의 심한 부작용이 온 여성을 인터뷰 한 것이다. 물론 모든 약이 그렇듯, 응급피임약도 부작용이 있다. 하지만 티비에 나온 여성처럼 심한 경우는 드물다고 봐야한다. 페니실린 같은 흔한 항생제도 어떤 소수의 사람에게는 두드러기와 호흡곤란을 동반하는 심한 알러지 반응이 올 수 있고, 타이레놀 같은 약도 극소수의 사람에게는 온몸의 살같이 벗겨지는 심각한 부작용이 올 수 있다. 약이라는 게 그런거다. 약은 같아도 사람의 몸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티비에서는 응급피임약을 처방하는 의사가 '별 부작용이 없다'고 말하는걸 무책임하다는 식으로 그리는데, 뭐 잘은 몰라도 의사가 매번 항생제를 처방하며 '당신도 이걸 복용하면 심한 두드러기가 오는 극소수의 한명일 수도 있다'고 굳이 설명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부작용'의 의미에 대해서도 잘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응급피임약 복용 후 부작용이 있을 수 있지만, 대개는 self-resolving하고 일시적인 증상이다. 반대로 복용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는? 원치않는 임신, 원치 않는 출산, 혹은 임신 중절... 이 두가지 경우를 양쪽에 놓고 재어봤을 때 어떤게 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인지는, 내게는 꽤나 분명한 듯 싶다.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정답이 없는 문제이고, 또 개인적인 가치관 차이는 정부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의문점은 많다. 가톨릭에서는 응급피임약이 '초기 인간생명을 죽이는 일'이라며 반대한다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포 몇개로 이루어진 수정란을 '인간'이라고 정의하는 건 누구의 몫일까? (성경은 oocyte, embryo, gastrula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전에 쓰여진 것으로 알고있다...) 그렇게 따지면 한달에 한번씩 배출되는 난자도 인간인가? 수십억개씩 배출되는 정자 하나하나도 인간인가? 미국에서는 대략 이런 내용의 공방이 소위 'personhood law'라는 주제로 한창 진행중이다.]

응급피임약이 남용되고 임신중절이 성횡하는 상황이 생기는 건 적절한 성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가능하기만 하다면야, 이 세상 모든 남녀가 적당한 나이에 만나 가족과 친지들의 축복 속에 결혼을 하고 그 이후에 임신과 출산을 준비하고 계획한다면야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수많은 미혼의 젊은이들이 sexually active하다는 건 불편한(?) 진실이고, 더더욱 불편한 진실은 그들에게 원하지 않는 임신과 성병을 막을 수 있는 적절한 방법에 대한 교육이 절실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사후피임약의 상표명은 "Plan B"이다. 최선이 아닌 '차선'이라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최선, 즉 Plan A는 무엇일까? 가장 안전한 예방법은 성교육일테다. 교육을 통해 당사자들에게 선택권을 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왜 출산률이 낮다고 체외수정시술에는 몇백억씩 지원해줄 수 있고, 낙태율이 높다고 여성들과 의사들에게는 손가락질 할 여력은 있는 사람들이 안전하고 효율적인 성교육과 피임법에 투자할 생각은 못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