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를 사다

Posted by hi G on 2011. 4. 18. 12:38
오랜만에 청바지를 샀다. 대학교 내내 몸무게에 큰 변화가 없어서 청바지를 자주 살 필요가 없었는데, 졸업하고 지난 2년간 완전 고무줄 놀이 하느라 입을만한 청바지가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생각난 건데, 청바지 사이즈 만큼 몸상태, 그리고 정신건강을 잘 드러내는 것도 없다.

미국에 처음 유학왔던 중학교 시절, 미국 사람들은 정말 청바지밖에 안 입는 듯 했다. 게다가 백인 여자애들은 얼마나 날씬하고 쭉쭉빵빵하던지... 당시 한창 살이 올랐던 나는 그때 청바지 쇼핑하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가끔씩 악몽에 나온다. 미국애들이 예쁘게 입던 boot cut 스타일이 도저히 안어울려서, 미국에서 처음 산 청바지는 후질근한 통바지였다. 이제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몸무게도, 청바지 사이즈도 일정한 편이었는데, 졸업 후 1년 쉬는 동안 살이 엄청 빠졌었다. 집에 와서 긴장이 풀려서 그랬는지 몇 달동안 아프고, 마음도 쇠약했다. 그렇게 짧은 기간에 살이 그렇게 많이 빠져본 적이 없었다. 보는 사람마다 괜찮냐고 걱정스레 물어보고, 살 좀 찌우라고 충고했다.


그런 소리를 듣는 건 절대 건강한 상태가 아니다.


그 당시에 청바지를 하나 샀었다. 살이 너무 빠져서 입을만한 옷이 없었다. 백화점에 가도 맞는 옷을 찾을 수가 없었다. 유니클로 청바지는 3-4만원밖에 안했는데, 거기서 파는 제일 작은 사이즈를 사 입었다. 나 스스로도 놀랐다.

여자들은 이런 경험을 한번씩은 겪는 것 같다. 졸업과 취직 준비에 스트레스가 많았던 한 친구도 41kg까지 살이 빠진 적이 있다고 했다. 통통한 정도도 아닌, 아주 보통 체형인 어떤 친구가 잠시 연락이 끊긴 몇 년 사이 뼈만 남은 채 나타난 적도 있다. 이 외에도 거식증anorexia과 각종 식욕 이상 질환에 시달리는 젊은 여자들,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을 만큼 주변에 많다.

 아무튼 나는 학교에 돌아온 이후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시 살이 붙기 시작했다. 단순히 더 많이 먹어서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물론 먹기도 잘 먹지만...) 바쁘게 살며 잡생각이 없어지고 쓸데없는 걱정도 덜 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무엇보다 곁에 늘 한결같은 크리스가 있었다.

 오늘 산 청바지, 1년 전보다 사이즈가 거의 2인치나 늘었다. 대학교 때 입던 그 사이즈로 돌아온 것이다. 나는 만족한다. 지금 내 청바지 사이즈에, 그리고 마음가짐에. 


그치만 여기서부터 더이상은 늘리지는 말자는 게 오늘의 다짐. 하하하....

좋은 의사가 되는 길

Posted by hi G on 2011. 4. 13. 11:32
"30대 중반의 남성이 고열과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응급실을 찾았다. 흉부 엑스레이와 배양검사 결과 Pnemocystis carinii 감염에 의한 폐렴으로 밝혀졌다. 환자의 등에는 카포시 육종(Kaposi's sarcoma)으로 의심되는 짙은 자주색의 반점이 발견되었다. 면역 체계에 심각한 결핍이 있는 환자에게만 나타나는 위와 같은 증상을 보며 당신은 HIV 감염을 의심한다. 그러나 환자는 HIV 검사를 완고하게 거절한다. 그는 심한 불안 증세를 보이며 아픈 몸을 끌고 막무가내로 병원을 떠나려고 한다. 이때 당신은 어떻게 해야하는가?"

오늘 오후 HIV/STI ethics session. 감염내과 과장 팀 플래니건 교수가 환자 사례를 읽어나갔다. 큰 키에 약간 구부정한 어깨, 돋보기 안경을 뾰족한 코에 얹은 플래니건 교수님은 그 모습도 이름도 영락없는 아일랜드계다. 온화한 미소와 너그러운 성품에 잘 어울리는 self-deprecating humor는 넉살 좋은 호빗을 연상시킨다. 며칠 전 HIV/AIDS patient presentation때도 봤지만, 환자들의 마음의 병까지 알아보고 치료하는 보기 드문 인의(仁醫)임이 분명했다. 옆에 앉아있던 Jen이 속삭였다. "저런 남편을 만나야 되는데!" (아쉽게도 플래니건 교수의 부인은 우리 학년 담당 지도교수님이신데, 아무리 노력해도 싫어할 수 없는 진짜 천사같은 분이다. 정말 환상의 커플이랄까.)

보통 같았으면 학생들 대부분 꾸벅꾸벅 졸고 있는 Doctoring 강의지만, 오늘만큼은 모두의 눈이 반짝였다. 플래니건 교수의 열정과 센스도 일조를 했겠지만, 평소와 달리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 심도있는 대화에 모두 집중하며 경청했다. 플래니건 교수의 강의가 이어졌다.

"의사로서 우리는 환자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환자가 병으로 고통받고 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병원을 찾아온 환자가 왜 진료를 거부하고 떠나려는 걸까요?"

잠시 강의실에 침묵이 흘렀다.

"환자들에게는 자신이 왜 아픈지를 알아내는 것보다 의사가 자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지 여부가 더 중요합니다. 위 사례의 경우, 환자는 자신이 HIV 보균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앓고 있는 증상들을 치료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치료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환자가 HIV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있는 이 같은 경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환자가 사회적 낙인이 두려워 검사와 치료를 거부할 경우, 의사는 HIV 균검사(ELISA, Western blot, viral load 등)를 건너 뛰어도 좋다고 플래니건 교수는 말했다. 바이러스를 직접 감지하는 검사 대신 CD4 count로 환자의 면역력을 파악하고, 항레트로바이러스제(ART)를 처방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정식 프로토콜을 따르는 것에 비해 제약이 있을 수 있지만, 치료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환자 스스로 이를 거부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의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검사 기기가 부족한 개발도상지역에서는 바이러스 검사 없이 임상 증후만 보고 치료를 시작하기도 한다며 옆에 있던 다른 교수님이 덧붙였다. 

만약 그 상황에서 의사가 HIV 검사를 요구했다 해도, 사실 프로토콜을 따른 것일 뿐이다. 하지만 이로 인해 환자가 치료를 거부하고 불필요한 고통을 받게 된다면, 이 또한 의사의 책임인 것이다. 그 어떤 malpractice law로도 처벌할 수 없는 의사의 과실. 

의사들이 모두 플래니건 교수님만 같다면 병원 가는게 그렇게 싫지많은 않을텐데. 하지만 많은 의사들, 특히 한국 의사들은 의대에서 의료윤리 교육을 받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몹시 아쉽다.

좋은 의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든, 의대에 온 이후로 가장 감동받은 수업이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플래니건 교수님같이 멋진 의사를 보게 되어 기쁘다. 앞으로도 자주 뵙고 배울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