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혹은 주체

Posted by hi G on 2012. 3. 22. 23:27

고대 그리스의 테이레시아스라는 사내가 길을 걷다가 뱀 두마리가 교미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신기하고도 징그럽게 느껴졌는지, 그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그중 한놈의 머리를 내치렸는데, 마침 암컷이었다. 그런데 이 뱀에게는 신비한 힘이 있어서, 남은 수컷은 테이레시아스에게 벌을 내려 그를 여자로 바꿔놓았다. 테이레시아스는 이에 대해 별로 불만이 없었는지, 그 이후로 7년간 몸을 팔며 창녀로 살았다.
 
7년 후 어느 날 테이레시아스가 길을 가다 뱀이 교미하는 장면을 또 보게 되었다. 이번에도 지팡이를 내리쳤는데, 이번에는 수컷이 맞았다. 이렇게 테이레시아스는 다시 남자로 돌아오게 되었다. 
 
얼마 후 올림푸스에서는 제우스와 아내 헤라가 언쟁을 벌이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더 큰 성적 쾌락을 느낄까 하는 것이었다. 최고의 신이자 최고의 바람둥이인 제우스는 당연히 남자의 쾌락이 강하다고 생각했고, 헤라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부부는 남자와 여자로 둘 다 살아본 단 한 명, 테이레시아스를 불러 공정한 판결을 부탁했다.
 
“여자의 쾌락이 남자의 쾌락보다 아홉 배 강합니다.”
 
대답이 맘에 들지 않았던 제우스는 테이레시아스를 장님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대답이 맘에 들었던 헤라는 그에게 예지력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스 최고의 예언가 테이레시아스의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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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김지수가 16살 연하 남자친구와 열애중이라는 사실을 공개하고 인터넷상이 뜨겁다. 본인은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지만, 결국 남들 눈치만 보며 살다가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린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연이어 악성 댓글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멀쩡한 총각 인생 망치지 마라, 못생긴 한국 아줌마들한테 괜한 환상을 심어주게 됐다, 일찍 시집갔으면 아들 나이뻘 아니냐 등등... 한편으로는 이런 수준낮고 예의없는 무분별한 댓글에 신경쓸 필요없다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추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곳이 인터넷 댓글이 아닌가 싶어서 마음이 몹시 불편해진다.
 
여성이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해 한국인들은 아직도 알러지가 심한 듯하다. 내가 아는 주변 여자들만 해도 그에 큰 불만이 없는 듯하다. ‘어떻게 하면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에 집중하는 여자들이 대부분이지, ‘저 남자를 내가 갖고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다. 
 
하지만 -- 테이레시아스의 우화가 보여주듯 -- 여자의 욕망은 분명히 존재한다. 아니, 이상한 점은 오히려, 모두가 아는 사실에 대해 다들 쉬쉬하는 점이다. 왜 연애 혹은 성애에 있어 여자는 수동적 역할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걸까. 
 
30대 후반의 여배우가 16세 연하의 남자친구를 사귀는 것은 같은 나이의 남자 배우가 16세 연하의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에 비해 왜 더 화제가 되고 문제가 되어야 하는걸까. 왜 까마득한 연하의 여자를 사귀는 남자는 경탄을 받고, 김지수씨는 손가락질을 받아야 하는걸까.
 
그건 다 생물학적인 거다, 20대 여성은 가장 가임 능력이 활발하기 때문이다, 라는 주장은 평균 출산율이 채 2명도 안되는 이 나라에서는 부족하기 짝이없다. 자식을 많이 갖기 위해 한참 어린 여자를 만난다고? 이 답은 남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이에 대해 더 심도있는 글을 읽고 싶다면 여기를 클릭.) 

결론적으로, 이건 김지수씨와 남자친구 외에는 그 누구도 상관할 일이 아니다. 김지수씨를 욕하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모습으로 쌓인 자신의 욕구불만, 예를 들면 자신도 더 어린 애인을 갖고 싶은 마음, 혹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난을 투영하는 것일 뿐. 본인들이 행복하고, 당사자들 스스로 선택한 일이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다들 흥분하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