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ster

Posted by hi G on 2011. 4. 25. 06:58
가끔씩 스스로에게 묻는다.
좋은 글이란 어떤 것일까. 어떤 글을 좋은 글이라고 하는 것일까.

사실 최근 '그냥 그런 글' 한 편을 읽으며 이런 질문을 품게 됐다. 단어 선택도 적절하고, 요지도 분명한 편이고, 말랑말랑하고 멜랑꼴리한 맛도 있는데, 왜 좋은 글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왜 전혀 감동이 없을까.

가장 큰 문제는 카타르시스가 없다는 것이었다. 카타르시스catharsis란 어떤 문제나 갈등을 자각하고 이를 글 또는 기타 매체로 표현함으로써 얻는 감정의 정화, 거듭남, 긴장의 해소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는 표현력도 중요하지만 애초에 글쓴이를 움직인 동기, 즉 문제 상황이 전제되어야 한다. 아무리 표현력이 좋아도, 애초에 해결되어야 하는 갈등 또는 문제의식이 없다면 그 글은 목적 없는 말장난일 뿐인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심각한 고민보다는 단조로운 노동을, 신파극보다는 가벼운 농담을, 고통을 감수할 바에는 지루함을, 그리고 지루함보다는 쾌락을 쫓으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하지만 고통과 갈등을 회피하며 살기에 이를 직면함으로써 얻는 카타르시스 또한 점점 느끼기 힘들어지는 게 사실이다. 문학이나 영화의 흐름을 봐도 그렇다. 정식으로 공부한 건 아니지만, 내가 자라온 90년대와 지금 살고 있는 21세기만 비교해 봐도 그렇다. 90년대까지는 문학도 영화도 감정표현에 솔직했다. 하지만 요즘 그런 글이나 영화를 만든다면 ‘촌스러워’ 보이기 십상일 것이다. 요즘 글과 영화와 예술은 너무 세련되고 고상하고 표현에 인색하다. 답이 없는 질문만 잔뜩 늘어놓고 똑똑한 척 한다. 방향성이 없고, 감동도 없고, 밋밋하기 태반이다.




부활절이다.

약속이나 한 듯 온 세상이 기나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듯했다. 부활절 예배를 위해 찾아간 보스톤 Highrock Church 앞에도 벚꽃과 목련이 수줍게 피어나고 있었다.

부활절을 맞아 내 신앙의 요체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죄와 벌로부터의 구원, 죽음 이후 영원한 삶의 약속,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우리가 품고 고민하기에는 너무 심각하고, 다소 촌스럽기까지 한 주제다. 사서 고민하지 않아도 밥을 굶지 않아도 되고, 소소한 고민을 잊게 해줄 쾌락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이 널려있는 우리들에게 믿음은 가끔씩 필요할 때마다 사서 쓰고 버리면 되는 일회용품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독교는 궁극적으로 카타르시스의 종교다. 기독신앙의 중심에는 죄악, 고통, 죽음에 대한 자각이 자리잡고 있다. 창조주의 아들인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해 죽음을 이겨내고 부활하신 것을 믿음으로 인해 크리스천들은 궁극적인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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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앙의 뿌리는 어머니.
나의 하나님은 엄마가 병과 죽음의 문턱에서 만난 하나님이다.
병으로부터 회복하신 이후의 삶을 모두 축복으로 믿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고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매일같이 노력하시는 엄마.

영원한 삶의 약속을 믿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모든 욕심과 두려움을 초월해 오늘 하루를 충만하게 살 수 있는 원동력-
엄마의 삶을 통해 배운 그 생명의 메시지는 오늘 찾아간 교회의 부활절 설교 말씀의 요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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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에 와서 세상의 온갖 질병과 고통과 노화와 죽음에 대해 배우다 보면 온갖 시니시즘과 두려움이 밀려올 때가 있다. 한 교수님은 ‘the art of medicine consists of entertaining the patient while nature takes its course’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만약 죽음이 정말 모든 것의 끝이라고 믿는다면, 의사만큼 쓸데없는 직업도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를 끊임없이 겸손케 하는 창조주의 존재를 믿기에,
세상에 '나'를 넘어선 큰 목적과 설계가 존재한다고 믿기에, 
무엇보다 영원한 삶의 약속을 믿기에, 

오늘 나는 카타르시스로 충만한 부활절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