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ttaca

Posted by hi G on 2011. 5. 22. 02:25
요즘 무엇에 홀린듯 계속 영화만 본다. 학기가 끝날때가 되서 그런지 영 집중도 안되고, endocrinology는 그닥 어려워 보이지 않고, 강의를 들으면서도 계속 영화 생각밖에 안난다. 거의 하루에 두 편씩 보는 것 같다. 책은 아무래도 좀더 집중력을 요하고, 아마도 당장 짐싸서 어디로 튈 수는 없으니까 대신 영화로 탈출 욕구를 대신 달래려 하는 것 같다.

어제 본 두 번째 영화는 1997년작 <가타카Gattaca>. Jen과 극장에서 <Bridesmaids>를 보고난 뒤에 잠도 안오고 해서 우리집에 와서 한편을 더 봤다. 난 <Gattaca>를 도대체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르겠다. 처음 본건 아마 개봉했을 때쯤 그러니까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지만 정확히 기억은 안난다. 당시에는 어려서 뭐가 뭔지도 모르고 봤던 것 같은데, 무의식 속에 남아있던 한 장면 혹은 대사가 나이가 든 이후에 어떤 계기에 의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른다. 좋은 영화라는게 그런 것 같다. 그건 좋은 책 또는 어릴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읽었던 고전(이를테면 그리스 신화, 성서 등)도 마찬가지다.

<Gattaca>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의해 위협받는 인간성의 의미에 대해 뼛속 깊이 성찰하는, 알도스 헉슬리와 아이작 아시모프의 영향이 역력한 그런 영화 중 하나다. 멀지 않은 미래, 사회는 피 한방울, 눈썹 한오라기 속 게놈으로 인간의 가치를 매기는 우성학의 지배를 받고 있다. ‘Gattaca’는 유전공학으로 태어난 초인들만이 입사해 과학의 발전에 더욱 이바지하는 권위있는 우주탐사국의 명칭이다. 이런 Gattaca에 입사해 우주비행사가 되는 것이 바로 유전공학의 도움 없이 (지금 우리들 대부분처럼) 남녀의 사랑과 신에 대한 믿음에만 의지해 태어난 주인공 빈센트(Ethan Hawke 분)의 꿈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99%의 심장질환 발생 가능성과 30세의 기대수명을 선고받은 빈센트가 철저하게 과학과 이성으로만 지배되는 Gattaca에 입성할 수 있을까.



Gattaca, 1997. Directed by Andrew Niccol


확률을 거스르고 완벽과 싸우는 하나의 불완전한 인간. 그러나 그 약하고 비이성적인 모습이야말로 우리를 기계로부터 구별짓는 진정한 ‘인간성’이라고 말하는 영화 <Gattaca>는 그런 면에서 <매트릭스Matrix>와 같은 장르에 속한다 (이것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예전에 매트릭스에 대해 써놓은 글이 있는데 좀 길지만 옮겨볼까 한다.


영화 '매트릭스'를 보셨나요? 인간의 인식력을 장악하고 조종하는 매트릭스 시스템에는 '아키텍트'(건축가)와 '오라클'(신탁)이라는 두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아키텍트는 등식의 평형을 이루는 힘이고, 오라클은 등식의 평형을 깨뜨리려는 힘입니다. 두 요소가 서로 견제하며 공존을 이루는 게 우리가 사는(혹은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세상이라는 거죠. 정확도와 효율성을 목적으로 하는 아키텍트는 첫번째 매트릭스를 죄도 악도 고통도 없는 완전무결의 낙원으로 지었습니다. 그러나 악하고 결점투성이인 인간에게 '낙원'은 적합한 시스템이 아니었어요. 실패를 교훈으로 아키텍트는 오라클의 제안에 따라 99%의 성공률을 가진 매트릭스를 고안했습니다. 그 1%의 '불확실성'의 조각들을 모은 것이 바로 '네오'입니다. 100%의 실패 대신 99%의 성공을 선택해야했던 아키텍트에게는 악몽같은 존재이지만, 기계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매트릭스 3부작 중 두번째 '리로디드'의 끝부분에 네오와 아키텍트의 대면이 있습니다. 아키텍트는 네오에게 매트릭스의 생성과 매커니즘을 설명해주죠. 기계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간성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습니다. 인간의 타고난 불완전성 - 죄악, 고통, 노쇠, 죽음 - 은 기계들에게는 비웃음의 대상인 동시에 불가해성不可解性의 대상이죠.

이 장면을 볼 때마다 기계가 되고 싶어 안달하는 요즘 사람들 모습이 생각나 쓴웃음이 납니다. 우리를 기계로부터 구별하는 건 우리의 불완전성인데 말이죠. 나는 그 1%의 불완전성이고 싶습니다. 그 불완전성의 가치를 아는 오라클이고 싶고, 인류의 존속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택하는, 다소 반직관적인 네오이고 싶습니다. 등식의 평형을 깨뜨리고픈, 기계들을 놀려주고픈 짖궂은 충동..이랄까요. 당신에게는 그런 충동이 없습니까?  

(2008.10.26)



<Gattaca>나 <매트릭스>같은 부류의 영화들이 제기하는 의문은 이미 우리 삶 속에 현실로 다가와 있다. BRCA 유전자에 의한 유방암, 헌팅턴병, 선천성 골형성 부전증Osteogenesis Imperfecta Congenita 등 유전자 검사로 발견할 수 있는 질병은 셀 수 없이 많고, 불임클리닉에 가면 착상전유전검사Preimplantation Genetic Diagnosis를 통해 유전질환을 물려받지 않은 태아를 선택해 임신할 수 있다. 멧스쿨에서는 유전검사에 대한 강의가 있을 때마다 윤리적 질문을 꼭 포함시킨다. 치료법 유무에 따라 유전 검사가 꼭 필요한 것인지, 가족들 혹은 배우자에게 어떻게 말을 꺼해야 하는지, 검사 결과를 받은 후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할 것을 꼭 가르친다. 정답이 있는 질문이 아니지만, 그래도 반드시 의사로서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하는 것들이다.

Mind-numbing한 기계적인 의대 공부는 사람을 지치고 외롭고 냉랭하게 만들지만, 그래도 의사라는 직업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건 바로 이 과학과 인간성의 접점에 서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 가타카. 사실 내가 이렇게 지루하게 늘어놓는 것보다 훨-씬 멋진 영화다. 바랜듯 노오란 시네마토그래피, 빈티지 스포츠카, 슈베르트의 피아노 즉흥곡이 컴퓨터 클러스터, 타이탄을 향한 우주선, 그리고 Frank Llyod Wright의 거대하고 차가운 초현대적 건축물과 장엄한 대조를 이룬다. Uma Thurman과 Jude Law가 이렇게 매혹적인 모습도 다른 영화에서는 결코 볼 수 없다. 어제 같이 본 Jen이 재깍 Facebook 'Favorite Movie'를 업데이트 했는데, 아마 당신도 그렇게 하지 않고선 배길 수 없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