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ear 1을 마치며

Posted by hi G on 2011. 6. 11. 09:15
일주일 전 본과 1학년이 끝났다는 사실을 실감하거나 즐길 여유도 없이 바로 이사하고 차 보러다니고 놀러다니고 비행기 타고 한국까지 오느라 정신이 없었다. 집에 온지 겨우 이틀인데, 시차적응하랴 짐정리하랴 머리하랴 괜시리 바빴다. 그 사이에 학교 웹사이트에 마지막 시험 점수가 떴고, 나는 끝까지 내 마음을 졸였던 내분비학endocrinology을 낙제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공식적으로 1학년을 마무리 지었다.

사람은 바쁘게 살아야 한다는 걸 맘속 깊이 새기게 된 일년이었다. 사람은 바빠야 딴생각, 잡생각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의대에 온 이후에도 상대적으로 바쁘고 어려운 과목과 그렇지 않은 과목이 있었는데, 오히려 배울게 너무 많고 어려울수록 나는 시간 가는줄 모르고 학업에 몰입했다. 그럴 땐 '이게 조금만 덜 어려웠으면' 혹은 '배울게 조금만 적었으면' 혹은 '시간이 딱 하루만 더있었으면' 하고 바라곤 하지만, 막상 조금 더 여유가 있거나 단순한 걸 배울때에는 (예를 들면 얼마전까지 공부하던 endocrinology -_-) 지루함에 몸을 비틀고 괜시리 뜬구름이나 잡기 일쑤였던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마지막 한 달을 제외하곤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어려운 공부를 했다. 조직학histology, 생화학biochemistry, 해부학anatomy, 병리학pathology, 뇌과학brain sciences, 미생물학microbiology, 전염병infectious diseases, 내분비학endocrinology -- 여기까지가 1학년때 배운 과정이다. 이렇게 늘어놓으니까 굉장히 많은 걸 배운 것 같아보인다. 진짜 힘들게 했는데, 정작 제대로 기억나는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너무 후다닥 지나가 버려서, 주변 사람들이 등을 토닥여주는 것만큼 대단한 일을 한 것 같은 느낌도 들지 않는다.

다시 들을 수 있다면 나는 brain sciences를 더 배우고 싶다. 나는 학부때 Neuroscience 수업을 전혀 듣지 않아 뇌에 대해 아는게 하나도 없었는데, 정말 눈이 번쩍 뜨이는 과목이었다. 조금만 맘의 여유가 있었거나, 조금만 미리 아는게 많았다면 정말 즐겁게 배웠을텐데, 쏟아지는 강의 내용 따라잡기에 벅차 힘겹게 마무리 지었다. 해부만 다시 안해도 된다면 brain sciences를 다시 들어보고 싶다.

반면 절대 다시 하고 싶지 않은 과목은 endocrinology (그냥 재미가 없어서), psychiatry (wait, what just happened?), 그리고 anatomy. 해부에 관해서는 아마 책도 한권 쓸 수 있을거다. 실제로 우리 의대 선배이자 프로비던스에서 정신과 전문의를 하고 계시는 Christine Montross가 쓴 <Body of Work>라는 책이 있다. 한국어로 번역되진 않았지만, 의대생의 해부학 실습이 어떤지 혹시 궁금한 분이 계시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그런 사람 별로 없겠지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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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포부-
이런건 조금씩 priority list에서 밀려가고 있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생각도 하지 않았던 아주 일상적인생각들(이를테면 시험을 통과하느냐 여부, 쌓여가는 학자금 대출, 결혼, family, 취직 계획)이 점점 꿈을 대체한다. 꿈 같은건, 공부를 하다 너무 지치고 unhappy할때 가끔씩 눈을 감고 떠올려본다. 가난한 나라에 multi-purpose 진료소를 설립하고 운영하는 것, 그런 곳에서 내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만큼 아픈 사람들을 돕는 것...

아빠는 예전에 의대 공부를 'castration'이라는 강한 단어로 표현한 적이 있었다. 휴머니즘, 윤리, 자기성찰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의대 공부를 1년 맛보며, 내가 학부때 읽고 접했던 위대한 의사들이 왜 흔치 않은 사람들이었는지 더욱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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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상 1년이 끝나고 나니 마음이 굉장히 쿨하다. 한번 더 하라고 하면 즐거울 것 같고 진짜 잘 할수 있을 것 같은데 -- 역시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거다. 얼마나 괴롭고 지치고 외로웠는지는 애써 기억하려 해도 잘 나지 않는다. 그래서 방학이 필요한 건가... 이번 여름 프로젝트도 빨리 진행을 해야할텐데. 생각보다 바쁜 여름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