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ce of a disease

Posted by hi G on 2012. 2. 8. 16:21


의사는 한번 본 케이스는 절대 잊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의대에서는 방대한 양의 지식과 병명을 외우지만, 사실 그중 의사가 배우고 기억하는 건 실제로 그 병을 앓은 환자라는 것이다.

본과 2학년인 나는 임상 경험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만, 그나마 여기저기서 주워듣고 어깨 넘어로 본 적이 있는 병에 대해 배울땐 머리에 더 쏙쏙 들어온다. 

요새 소화기gastrointestinal를 배운다. 먹고 사는게 중요한 만큼 이에 관련된 질환도 수없이 많은데, 그래서 그런지 각종 질환을 앓고 또 세상을 떠난 유명인들이 생각나 적어본다.


1. 故 장진영

훤칠한 몸매에 서글서글한 얼굴, 짧고 발랄한 파마머리가 아직도 인상깊었던 여배우. 그는 위암gastric cancer으로 3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대부분의 위암은 식생활 및 헬리코박터 균 감염에 의한 장기적 염증 및 궤양과 연관이 있지만, 그가 앓았던 것으로 전해지는 "diffuse type" 혹은 "signet ring cell carcinoma"라는 종류의 위암은 유전적 요소가 가장 크며 생활습관과는 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비해 발병 나이가 더 젊고, 초기 증상이 거의 없어 진단시 이미 상당히 진행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가 세상을 뜨기 직전 남편과의 사랑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을 울렸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뜬 해의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에 그녀의 친구가 나와 추모사를 했던 것도 생각이 난다. 그렇게 나도 환자 한명을 기억하게 됐다.


2.  故 Christopher Hitchens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는 칼날같은 언변으로 잘 알려진 저널리스트 겸 문화평론가였다. 그의 글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Vanity Fair에 왜 여자들은 재미가 없는지에 대해 쓴 칼럼을 재밌게 읽은 적 있었다. 사실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그의 무신론 신앙(?) 때문이었다. 한참 내 신앙을 고민하고 탐구하던 때에 나는 오히려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 히친스같은 유명한 무신론자들의 글을 많이 찾아 읽었다. 그들이 나를 설득시킬수 있을까 하는 궁금함도 있었고, alternative worldview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던 것 같다.

평생 떠들썩한 모임과 격렬한 논쟁, 술과 담배를 즐겼다는 그는 식도암esophageal cancer으로 지난 12월 세상을 떴다. 향년 62세. 식도암은 미국에서는 발생률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데, 식도에는 보통 다른 내부기관을 감싸는 가장 바깥쪽 serosa라는 막이 없어서 주변 기관으로의 전이가 더 쉽고, 진행이 많이 될수록 5년 생존률이 급격히 떨어진다. Hitchens 역시 진단을 받은 후 2년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암 진단을 받은 후에도 그는 '내게 술과 담배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술과 담배가 '지루함을 달래주고, 다른 사람들을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주었다'며 '이상하게 들릴수도 있지만, [술과 담배를 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고 했다. 

우디 앨런은 '100세까지 살고 싶게 만드는 것들을 모두 포기한다면 100세까지 살 수 있다'고 말했는데, Hitchens는 바로 그 선택을 한게 아니었을까.


3. 故 박완서

철들기도 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아주 오래된 농담>을 읽었고, <미망>의 도입부에 나오는 젊은 양갓집 미망인의 숨겨진 욕망과 처절한 죽음이 그려진 장면을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며 소설보다 비소설로 취향이 옮겨가며 나는 수필집이나 역사책을 더 즐겨읽게 됐는데, 대학에 온 후 읽은 박완서의 잔잔한 성서묵상집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은 지금도 내 책꽂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서문에 쓰신 말씀이 있는데, 나서기 좋아하고 글 쓰는 것도 좋아하고, 자기애 또한 엄청 강한 내가 두고두고 기억하려고 애쓰는 말씀이다.

"그러나 봉사가 그렇게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봉사란 자기 이익을 돌보지 않고 국가나 사회 또는 남을 위해 일하고 섬기는 일입니다. 자기주장을 펴고 싶고, 자기 글이 돋보이고, 자기 이름을 빛내고 싶은 글쟁이한테는 가장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박완서 작가는 2011년 1월 담낭암gallbladder cancer으로 사망했다. 향년 80세. 담낭암은 흔한 종류의 암은 아니지만, 사망률이 매우 높다고 한다. 드문 질병이라 그런지, 수업에서는 거의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기억한다. 한 위대한 작가의 삶과 죽음을.


4. 故 장준혁 (드라마 <하얀거탑> 김명민 扮)

다행히(?) 이 환자는 허구의 인물이다. 하지만 최근 본 어느 실존 인물보다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사람. 드라마 <하얀거탑>의 주인공, 그 누구보다 뛰어난 외과 의사였지만 야망을 위해 온갖 술수를 가리지 않았고 오만으로 똘똘뭉쳐 환자를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자신의 과실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megalomaniac, 장준혁.

그렇게 앞만 보고 물불 가리지 않고 전진해온 그에게, 죽음은 그 누구보다 가혹하고 허무하게 다가왔다. 간담췌 (간, 담낭, 췌장) 수술의 일인자인 그에게 다름아닌 담관암cholangiocarcinoma이 찾아온 것이다.

우리가 섭취한 지방을 흡수하는데는 담즙bile이 필요하다. 간에서 만들어지고 담낭에 보관되어 있는 담즙이 소장으로 넘어가는 길이 바로 담관이다.  담관암에 대해서는 수업에서 가르치는 것이 많이 없었다. 아마 시험에서는 크게 다뤄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장준혁의 증세를 상세하게 묘사한다. 복통, 식욕부진, 피로, 황달... 증상만 가지고 진단을 내리기는 좀 막연하지만, 드라마에서는 각종 피검사, CT scan, 내시경 검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담관암은 10만명에 한두명 꼴로 발생하고, 진단시 암이 많이 진행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예후가 좋지 않다. 진단 후 장준혁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자리에 눕고, 세상을 뜬다. 그 엄청난 욕망과 야망이 모두 물거품이 된 채.

그 허무함에, 드라마의 최종 메세지가 무엇이었는지 오히려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것이 한순간 꿈이다'는 '구운몽'적인 메세지를 남기고 싶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