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the sex, stupid.

Posted by hi G on 2011. 6. 14. 02:58
나도 종종 writer's block이 올 때가 있다. Leila가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이지만.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이미 누군가가 해버렸다는
경외와 허탈이 뒤섞인 느낌이랄까?

제임스 조이스는 '모든 소설가들은 결국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것이다all novelists have only one story, which they tell again and again'라고 했다는데, 이보다 더 공감가는 말이 없다. 우리들 대부분의 비극은 단지 그 '한 개의 스토리'를 찾지 못하는데 있는 것일 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도 결국엔 몇가지 주제로 집약할 수 있는데, 이 대부분 과거의 어느 위대한 작가가 이미 손을 댄 주제라 아쉽기 그지없다. (어쩌면 내 '스토리'가 이 책들을 읽으며 형성된 것이라고 해야 맞는 건지도 모르지만, 타이밍으로 봤을때 이미 내 안에 형성된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에 이 책들을 공감하며 감동받으며 읽은 건지도 모른다.)

고향에 관한 모든 것은 이미 박경리 선생이,
외국 생활은 무라카미 하루키,
신앙과 성숙은 박완서 그리고 M. Scott Peck,
여행은 박범신,
혁명은 뤼쑨,
그리고
공상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내가 더이상 더할 것이 없을 만큼 위대한 글을 이미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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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탄압persecution 혹은 검열censorship이란 개념에 관심이 많다. 어떻게 한 사람 또는 조직이 다른 사람 또는 조직의 사상을 옳다고 혹은 그르다고 판단할 수 있는지 늘 궁금했다. 역사를 보면 한 시대에 금기시됐던 사상 또는 문화가 불과 몇십년 혹은 몇백년 안에 일반적인 것norm으로 받아들여지는게 다반사인데, 그럼 탄압과 검열의 주체가 되는 인간들은 역사 공부를 전혀 안한 사람들일까? 아무튼 과거에 금기시됐던 사상 또는 서적 등을 찾아읽는 건 나름의 묘한 쾌감이 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24-25세의 나와 같은 또래이다. 온갖 시행착오를 거쳐 아직 조금 미숙하지만 나름대로의 성숙한 자아를 찾기 시작한 나이랄까. 그 시행착오 중 하나가 90년대 초 당시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였던 마광수 구속 사건이다. 당시 그의 책 <즐거운 사라>가 음란물로 분류되며 구속수감되는 사건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절판된 상태라고 알고 있다. 대신 그의 다른 출판물은 서점에서 쉽게 구할수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에세이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1989)이다. 아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미리 해버린 작가들'에 대해 말을 꺼냈는데, 내가 성性에 대해 품어왔던 이런저런 생각들을 이미 20여년 전 유창한 글로 풀어놓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옥까지 갔다왔던 사람이 있었다는 데에 나는 다시 한번 경외와 함께, 선수를 뺏긴 듯한(?) 아쉬움을 느낀다.

여기서 '내가 성에 대해 품어왔던 이런저런 생각'이란 단순히 <Sex and the City> 드라마에 나옴직한 여자들의 수다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성이란 너무나도 직접적이면서도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서 말 몇마디로 풀어내는 게 쉽지 않지만, 결국 내가 마광수의 에세이를 읽으며 가장 깊이 공감했던 부분은 이런저런 이유로 성욕을 제대로 분출하지 못하는 자들의 삐딱한 시선 혹은 이중적 잣대, 즉 성을 죄악시하며 도덕적 우월성 또는 변태적 병리상태에 빠지는 자들의 불행한 모순에 관한 것이다. 미국에서도 가장 종교적 금욕을 중요시하는 유타Utah 주에 인터넷 포르노 시청률이 가장 높고, 전반적으로 보수세력이 강한 미국 남부에 10대 임신률이 가장 높다는 것만 봐도, 건강한 성욕의 분출과 솔직한 성 담론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들 내면에 존재하는 내적 모순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가장 좋은 글은 솔직한 글이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 솔직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에 비하면 나름 진보적인 미국에서도 아직까지도 씨름하고 있는 이런 이슈에 대해 이미 20여년 전 군부독재시절의 한국에서, 2011년에 읽어도 파격적이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이런 에세이집을 출간한 마광수는 엄청난 용기를 지닌, 시대를 앞서나간 문인이자 혁명가라고 생각한다. 직접 '성'에 대해 글을 쓰는 것 뿐 아니라 글을 쓰는 것 그 자체(혹은 미술이나 음악 등 자기를 표현하는 모든 행위)가 자기 자신을 은유적으로 발가벗기는 행위라고 늘 생각해 왔었는데, 독자 앞에서 '발가벗는 것' 역시 엄청난 용기를 요하기 때문이다. 마광수 역시 이 에세이집을 통해 자신의 성적 취향(특히 손톱 페티쉬즘에 대해), 연애·결혼관 등을 홀라당 공개한다. 게다가 문학 교수인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여, 멀게는 빈센트 반 고흐, 가깝게는 소위 '민족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서정주, 김소월, 윤동주, 이상, 한용운까지 망라하는 프로이트의 범성욕설pansexualism에 기반한 문학 비평도 몹시 흥미진진하다.

물론 20여년 전에 쓰여진 작품인 만큼 허점도 적지 않다. 사디즘, 마조히즘, 그리고 페티쉬즘에 대한 묘사는 내가 읽기엔 아직까지도 생소하고(^^;), 동성애에 관한 디스커션은 오류 투성이다. 게다가 일방적으로 남자를 사디스트, 여자를 마조히스트로 분류하는 그의 엄격한 젠더 롤 분배는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마광수가 말하는 성性 담론은 단순한 윤리적 쟁점 이외에 정치, 사회, 종교, 철학 등의 모든 분야에 대한 일종의 은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는 이 모든 것들이 성에 관한 은유일 뿐이라고 말하는 쾌락지상주의자이지만). 결국 그는 '모든 권위주의적 성격(파시즘, 나치즘, 극우주의 등)은 성 억압의 산물'이요, 정치적 민주화 역시 '성 해방' 없이는 불가능하고 믿는 사람이니까. 성에 대해 솔직해 질수록 사회 다른 분야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도 큰 바람이 불지 않을까. 아무튼, 20년 전에 비해 나름 '개방된' 사회를 살고 있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존재하는 모순과 가식을 속 후련하게 짚어내는, 간만에 통쾌하게 읽은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