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과일기 (3) This just in:

Posted by hi G on 2012. 10. 19. 11:24
1.

어제, 병원 로비에서 코드블루가 작동됐다. 어쩌다 병원에 배달할 것이 있어 방문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진 것이다. 즉시 Rapid Response Team이 소환됐다. 안내방송을 듣고 누가 또 발을 잘못 디뎌 넘어졌나보지, 하고 어슬렁어슬렁 그쪽으로 간 나는 즉시 난생 처음으로 죽음의 문턱에 놓인 사람을 봤다. 그를 소생시키기 위해 어느 레지던트 -- 같이 일한적은 없지만 늘 마주치면 눈으로 인사하던 그녀 -- 가 땀이 뻘뻘 나도록 있는힘껏 흉부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어텐딩, 레지던트, 간호사들은 차분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에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순수한 공포를 읽을수 있었다.

2.

뉴욕타임스에, '오래 앉아있으면 빨리 죽는다'는 요지의 웃기지도 않은 연구 결과에 대한 기사가 나왔는데 (이런 리서치는 대체 누가 하는거야?) 제일 맘에 드는건 시애틀의 Drew라는 독자의 한토막 댓글이었다:

"This just in: Life has been found to result in death."

3.

내가 몇주전까지 follow하던 환자가 얼마전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됐다.

이상하게 난 할머니 할아버지 환자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내가 되게 잘해드리긴 하지, 노인분들만 보면 울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이 나서, 그리고 우리 친할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못되게 굴었던게 아직까지도 넘 죄송해서), 암튼 이런 생각이 들게 된 이유가, 노인들이 이런저런 검사나 시술받는게 무서우면 자꾸 나보고 검사받는데 같이 가달라고 조르시는거다. 레지던트나 인턴한테는 그런말 안하는거 같던데.

이 할배도, 너무 자존심이 세서 아픈데도 아프단 소리 한마디 안하시던 분이, 나보고 MRI 받는데 같이 가줄수 있냐고 shy하게 물어보시더라. 할배, 갈수 있음 갈게요, 근데 하나도 안아프고 안무서울거에요, 하고 안심시키고 결국엔 안갔다.

나는 그 할배 퇴원하기 전에 outpatient로 트랜스퍼되는 바람에 그 이후에 호전이 되셨는지 어땠는지 follow up을 못했는데, 세상에나, Morning Report에 사망환자로 보고된 것이다.

4.

하루종일 일이 통 손에 안잡혔다.


내과일기 (2) On Death and Dying*

Posted by hi G on 2012. 9. 30. 01:30

결국 썩어문드러질 이놈의 몸뚱아리!

암 진단을 받고도 20년을 정정하게 더 사시고 아흔이 넘어서야 돌아가신,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내 외증조할머니께서는 늘 이 섬뜩한(?)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고 한다.

해부학 실습 당시 힘들어하던 내게 엄마는 '인간의 육체라는게 그렇게 연약하고 덧없는거야'라고 위로해줬다. 이보다 더 기절초풍을 할뻔했던건, 이제 아흔을 바라보시는 우리 외할머니께서, 당신이 돌아가시면 의과대학에 시신을 기증하시겠다는 얘기를 전해들었을때다. 나 또한 스스로 운전면허증에 'organ donor'라고 명시해 놓긴 했지만, 해부학 실습 이후 해부용으로 시신을 기증하는것 만큼은 절대 못해!라고 결심할 수밖에 없었던 만큼, 시신 기증은 엄청난 selflessness를 요하는 결정인 것이다.

온갖 산전수전 다 겪으신 우리 외갓집 여자들에게는 이런 무소유적이고 다소 운명론적fatalistic이기까지 한 인생관이 물려내려온다. 여기에 내세(천국?)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까지 혼합되어, 우리 외갓집 여자들은 정말 그 누구보다 현재의 삶, 육체에 얽매인 이 삶에 초연해보일때가 많다.

가끔 생각한다. 이 초연함이 이분들을 그 누구보다 강하게 하는것 아닐까.


가능한 한 죽음을 늦추고 고통을 해결하며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싸우는 직업을 택한 내게, 죽음은 일상에 가까이 있다. 특히 임상실습을 시작한 이후 죽음에 한층 가까워진 환자들도 많이 보고, MELD score다 APACHE II score다 뭐다해서 환자들의 사망위험률을 계산해내는 것도 내 일상의 일부다.

'죽음'에 대해, 어제 호스피스 센터에 다녀온 이후 좀더 생각하게 되었다.

호스피스hospice란, 더이상 의학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하고 예측수명이 6개월 미만인 불치병 혹은 말기 환자들이 생의 마지막 순간을 존엄성을 지키며 보다 편안하고 뜻깊게 마무리할수 있도록 보조하는 운동을 일컫는다.

근대 호스피스 운동은 1970년대 예일대 간호대학 학장이었던 플로렌스 월드Florence Wald와 '죽음의 다섯 단계'로 잘 알려진 정신과의사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zabeth Kubler-Ross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더이상 할 수 있는게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 메디케어Medicare예산의 4분의 1이 삶의 마지막 1년간 의료지출에 소모되고, 그중 40%는 마지막 30일간 사용된 지출이라는 통계가 그 사실을 잘 보여주지 않나 싶다.

작년 겨울, 중환자실에 한번 견습을 간 적이 있었다. 호스피스센터에 있던 90세의 환자를 가족들이 '가능한 모든 치료를 다 해야한다'며 중환자실로 모셔왔다. 말기암, 말기 알츠하이머로 의식도 없고 의학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는 이 환자에게 코드블루가 작동되었다. 흉부압박술, 전기충격, tracheostomy... 이 모든것이 환자의 삶을 연장시키기는 커녕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더하는 꼴인데, 가족들은 그게 환자를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는 이렇게 죽고싶지 않아'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어제 갔던 호스피스센터는 개조한지 3년밖에 되지 않은 깔끔하고 세련된 3층 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병실은 1인실이고, 각 방마다 1-2개의 소파베드가 있어 가족들이 언제든지 와서 쉬고 자고 갈수 있도록 배려를 해놓았다.

이 곳은 병원이 아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하는 병원과 달리, 이곳에서는 코드블루도 없고, 식물인간 상태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무기한으로 생명만 유지하고 있는 사람도 없다. 환자들 중 소파에 앉아서 농담을 건네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 의식이 희박하고 겨우겨우 옅은 숨을 쉬는,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분들이다.

이런 환자들을 진찰하고, 가족들에게 교수님은 꼭 같은 말을 하신다. 'He's on his own schedule.' 몇시간 후에 마지막 숨을 내쉴수도 있고, 그게 몇주 후가 될수도 있다. 정하는건 환자 스스로에게 달렸다 - 시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환자와 가족들, 그리고 의사 모두,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호스피스 센터에 계시는 교수님이 읽으라고 주신 글을 읽고 와닿는 부분이 있어 간추려 옮겨본다. (워싱턴 포스트 원문은 여기에.)

샴쌍둥이를 분리하고, 잘려나간 팔다리를 다시 부착할 수도 있는 이 시대에도 사람들은 아직도 기력을 소진하고 고령으로 죽는다. 그러나 현대 의학의 발전은 많은 미국인들에게 죽음이 의무가 아닌 선택인 것처럼 보여지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 문화에서는 죽음을 삶의 자연스러운 종착역이 아닌 의술의 실패로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은 비현실적인 기대치는 현대의학의 힘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시작된다. 1900년 미국인의 평균 기대수명은 47세, 2007년의 기대수명은 78세였다. 그러나 당시의 기대수명은 높은 유-영아사망률에 의해 왜곡된 부분이 있다. 유-영아 사망률이 대폭 감소하게 된데에는 심장수술이나 MRI가 아닌, 위생과 영양상태의 개선과 같은 간단한 보건정책의 덕이 높았다.

또한, 삶이 점점 도시화되며 우리는 죽음과 자연세계로부터 격리되었다. 도시에 살며 포장도로와 가로등에 익숙한 우리에게 죽음은 좀처럼 경험하기 힘든 낯선 이벤트가 되었다. 도시에서 자란 내 아이들이 죽음과 맞닥뜨리는 경우는 고작 낚시바늘이 눈에 꿰인 물고기, 혹은 파이어스톤 타이어에 깔려 죽은 길가의 다람쥐 정도이다.


끝으로, 몇년 전 우리 목사님께서 낭독하셨던 시편의 한구절을 옮겨본다. 육체에 얽매인 이 삶이 얼마나 짧고 부질없으며, 하루하루를 축복으로 여기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마음가짐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 구절이 몹시나 마음에 와닿아서 당시 일기장에 적어놓았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시편 90장 10-14절


*On Death and Dying: 1997년 출판된 퀴블러-로스의 책 제목.